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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위헌 자서전 감상문_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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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회 작성일 26-09-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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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찾아 한 평생- 현위헌(玄威憲) 


 그는 소년 시절 지리산을 누비면서 꿈을 더듬어 보았고 꿈속에 단골로 나타나는 그 사람은 안중근 의사 같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다. 문화재란 무엇일까?  일찍 잠자리에 누운 그는 수없이 질문을 던져보았다. 문화재란 조상들이 남긴 유산이 아닌가. 그렇다면 국가의 정신적인 재산이 곧 문화재다. 반민특위가 와해된 것도 좌우익으로 편을 갈라 동포끼리 총질을 하는 것도 일본인에게 정신을 빼앗겨 버린 때문이다.  그의 꿈속에 나타나는 그 사내는 안중근 의사이고  자기에게 문화재를 찾아오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주에서 경찰관으로 공산당 유격대 토벌작전에 참가하면서도 일본으로 오구라 씨를 찾으러 가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오구라 씨와는 질긴 어떤 전생의 인연으로 묶여 있다고 생각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는 동경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 대구 상공은행장, 조선합동전기주식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그가 일본으로 가져간 우리문화재가 수천 점이고,  대구 시내 어딘가에 묻어놓은 문화재도 수천 점 있다고 들었다. 


 평소에 남자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줄 알아야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문화재를 찾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내가 한 몸을 던져서라도 해야 할 가치 있는 일 아닌가? 가치 있는 일치고 어렵지 않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힘든 일을 사서 하느냐? 경찰이란 좋은 직업까지 버리면서 부모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주위의 비난도 받았다.


 문화재를 찾는 일은 의로운 일이다. 저 별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서도 안 되고 땅속에 묻혀 있어도 안 된다. 밤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서는 마당에 내려서면 되듯이 소중한 문화재를 보기 위해서 손쉽게 박물관에 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게끔 우리의 박물관에 진열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그는 평소 존경하는 동양철학가 이철수 선생의 조언을 들었다. 한번 농사를 하는데도 한 해가 걸리며 농부의 손길이 88번 가는 법이니 정성과 시간 걸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지는 일은 없다. 단시일 내에 끝내려고 조급해 하지 말고 십 년 이십 년 그 이상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현씨는 드디어 1949년 어느날 야밤에 남해에서 밀항선을 탓다. 야마치현(山囗縣)나가노시(長門市)세응사기(山 岐)역 부근의 어촌에 도착했다. 그는 시모노세키에서 보통열차를 타고 동경까지 1100키로 야간열차를 타고 갔다. 도중 오사카에 내려서 여기서부터 오구라 씨를 수소문 해가면서 찾아보기로 했다. 동경에 도착해서는 야모노데(山手)선 순환열차를 타고 오구라 씨를 찾아 동경시내를 맴도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한 달 이상 도쿄 시내를 배회했지만 오구라 씨를 찾을 길이 없었다. 


 수개월이 지나고 이바라키 현 히다치 시에서 고물장사를 시작했다. 책 한 관에 10엔, 고철은 20엔, 놋쇠 한 관은 800엔에 사들였다. 빌린 돈 3000엔을 자본금으로 시작했다. 와이어로프 150관을 사들여 23,000엔을 벌었다. 고물장수를 하면서도 남의 집 문패를 유심히 보고 다녔다. 운이 좋으면 오구라 씨를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오구라를 찾는 한편 고물장사에도 최선을 다했다. 다른 사람이 한 수레 살 때 그는 두 수레씩 사들였다. 다른 사람은 가는 곳이 일정했으나 그는 한번 간 곳은 안가고 오구라 문패를 찾아 천천히 돌면서 일일이 확인하고는 한 번 들어간 집의 고물은 전부 훑어보았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자금도 모아 놓았다. 조금 더 모으면 고물상을 그만두고 일본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오구라를 찾아 나설 생각만 했다.


 어느 날 대포 총알을 대량 사들여 거금을 벌었다. 고물 수집을 안 하고 쉬는 날은 거리에서 신사 같은 일본인을 만나면 조선합동전기주식회사 사장 오구라씨를 아느냐고 수소문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으나 헛수고 였다. 그 후 고물상을 그만두고 북해도 삿포로 시로 가서 남해 출신 하 씨가 경영하는 빠찡코 집 지배인이 되었다. 빠찡코 사장이 매출이 급증하자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겠다는 제안했다. 그러나 이를 거절하고 대신 오구라씨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때는 부동산업에 진출했다. 전망이 있는 부동산이 나오면 일단 계약금을 지불하고 계약을 한 뒤 타인에게 매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일교포 대한청년군인회 위문단의 일원으로 고향을 방문했다. 고향의 어른들로부터 자녀의 취직부탁, 교육비 지원 부탁 등이 수없이 들어왔다. 그때부터 오구라씨를 찾아 문화재를 반환시킨 다음에 , 다시 돈을 벌어서 고향에 반드시 장학회를 설립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결심의 씨앗이 지금 남해장학재단으로 꽃피우고 연인원 00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는 늘 이렇게 다짐 했다.「아침 일출을 바라보면서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진정 가치 있는 삶은 꿈을 갖는 거라는 점, 비록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깜깜한 어둠 속이라 하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목표한 바를 성취하는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꿈은 꼭 이루어진다. 목적이 이끄는 삶 이것이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다.」


 자기 사업이 있으면서도 틈만 나면 동경 가서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오구라 씨를 수소문하고 다녔다. 밀항한 지 어언 11년이 되고,  20대에 일본에 건너와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그는 일본인 중 오랜 지인 이토 사장과 하라시마 사장을 동경 근교 아다미(熱海)온천장에 초청해서 오구라를 찾는데 협조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자 이 두 분이 오랫동안 수소문해서 오구라가 지바(千葉) 현 나라시노 시 미모미 1114번지에 오구라컬레션을 하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오구라 씨를 만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내가 오구라 씨를 찾는 이유는 자연의 법칙대로 오구라 씨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것이다. 오구라 씨가 한국에서 가져간 문화재와 숨겨 놓은 문화재는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한민족의 소유라는 점을 강조했다. 오구라 씨 개인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민의 정신과 혼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고 주장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는 1870년 나라시노시의 유복한 농가에서 태어나 동경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우선상사 주식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1904년 35세 때 조선으로 왔다.  부동산임대업으로 부를 축적한 후 조선합동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한국제일의 전기회사로 성장했다. 오구라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조선의 고미술품과 유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전쟁종료 까지 25년 동안 문화재를 얼마나 많이 수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58년 일본에서 재단법인 오구라컬렉션을 만들어 한국의 문화재를 영구보전하게 된다. 현씨는 이토 사장 히라시마 사장 가와카미 교수의 협력을 받으며 오구라 씨를 수십차래 방문 설득에 나섰다. 


 도카이도 고주산스기(東海道五十三次)그림은 풍경화, 판화, 사라(접시), 병풍 등으로 현재 일본에도 두 질만 남아있는 국보급이다. 이 작품은 일본이 자랑하는 화가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의 작품이며 인간문화재이며 그의 그림은 국보로 인정된다. 오구라 컬렉션에는 등기상으로는 1300여 점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재로 2000 점이 보관되어 있다. 


 어려움에 부닥칠 때는 스스로  현위헌 나는 고구려인의 후손이다. 그 무엇이 두려운가? 담대하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어느 날 오구라는 속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현 씨 당신의 신의를 높이 사오 . 나는 당신을 백 퍼센트 신뢰합니다. 오늘은 내가 현 씨 에게 가슴속에 20년 동안 묻어 놓았던 비밀을 털어놓으리다. 나에게는 이제 당신 밖에 믿을 사람이 없소. 사실 유물은 대구소재 방첩대장실에서 창고로 가는 마루청 밑에 묻어 놓았소. 아마 오동나무로 50 가마니 정도 될거요.」


 북해도에서 동경을 오가며 7년 동안 설득하고 노력한 결과를 얻은 셈 이다. 대구의 유물은 한국에 귀속시키고 오구라컬렛션에 소장된 유물도 한국정부에 모두 돌려주라고 요구했다. 대신 도카이도사라 53점은 반드시 오구라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1949년 오구라씨를 처음만나 11년간 설득해서 드디어 1960년에 긍정적 답변을 얻은 셈이다. 


 오구라는 해방이 되면서 그동안 수집한 문화재 중 일부는 대구에 묻어두고 1천 여 점의 한국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갔다. 현 씨는 오구라 씨를 찾아 일본으로 밀입국해서 58년의 세월이 흘렀다. 밀입국자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쫒겨 다녀야 했던 날들, 조선인이기에 겪어야 했던 냉대와 설음, 밀항자로서 58년이란 세월은 수많은 상처투성이다. 


 대구시에 있는 오구라의 집 지하창고에 숨겨놓은 국보급 일본문화재 도카이도스기 사라 53점을 일본으로 되돌려 주는 조건으로 오구라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문화재 500점을 한국으로 되돌려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발굴과정에서 30점이 파괴되어버려 약속이행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현위헌의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후 오구라는 사망하고 그의 문화재는 모두 일본 우에노(上野)공원에 있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가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마음속으로 한 각오는 “움직이지 않는 뱀은 세끼 줄 밖에 되지 못한다”는 속담을 기억하면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칠 각오를 했었다. 그의 생은 끝나지만 마지막 소원은 일본 동경 우에노(上野)국립박물관 3층에 있는 우리의 문화재가 내 조국 한국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곡히 기도한다고 했다.


 이제 이 과제는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5천만 온 국민의 한마음으로 우리의 문화재를 본래의 자리에 돌려놓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온 국민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의송 202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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