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일 간의 명 외교관 현덕윤의 공적-성신당기
오랜 한일 관계의 역사속에서 가장 원만한 외교관 역할을 인물이 현덕윤(玄德潤)으로 평가 받는다. 본관은 천녕(川寧). 자는 도이(道以), 호는 금곡(錦谷). 현덕윤의 관향인 천녕 현씨(川寧玄氏)는 역관을 비롯하여 기술관을 다수 배출한 중인 가계의 대명사로 꼽혀 왔다. 천녕 현씨 가문은 고문서, 묘비 자료, 역대 묘 등이 풍부하게 남아 있어, 중인 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검토할 수 있을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현덕윤의 고조 할아버지 현수겸(玄壽謙,1513~1581)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고, 죽어서 양주목 별비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묻혔다. 현수겸 이후로 양주목 별비면은 천녕 현씨 가의 역대 묘로 자리 잡았다. 현덕윤의 증조 할아버지 대에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등에 책록되고,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역관 등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현한일(玄漢一)은 한학 역관이었고, 현덕윤과 현덕연(玄德淵,1694~1778) 형제는 왜학 역관으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는데, 그러한 후광에 힘입어 왜학 전공 역관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 가계의 역관 세전은 갑오경장까지 이어졌고, 일제 강점기 하에서는 독립 운동을 한 업적도 있다.
현덕윤은 1705년(숙종 31) 증광시에 급제하여 30여 년에 걸쳐 왜학 역관으로 근무하였다. 1711년(숙종 37) 통신사행의 상통사로 일본에 파견된 경험이 있다. 1718년(숙종 44) 쓰시마[對馬島]로 파견되는 역관으로 다녀왔다. 그는 역관 경력 이외에도 시(詩)에 능했고, 초서와 예서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또 현덕윤은 1729년(영조 5) 동래부 왜학훈도로 근무하면서 훈도청을 크게 보수하여 국가의 위신을 높였다. 훈도가 근무하는 청사는 설문(設門)을 지나 땔감 창고가 있는 고개를 넘기 전 평평한 곳에 자리하였다. 해변과 인접한 설문에서 산자락으로 능선이 이어졌고, 산꼭대기에서 왜관 방향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그 밑에 훈도 청사가 있었다.
훈도 청사가 1678년(숙종 4) 초량으로 왜관을 이전한 이후로 제대로 규모를 갖추지 못한 것은 비용 염출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훈도 현덕윤은 여러 해 동안 국비를 절약하고 개인 경비를 지출하여 훈도청을 보수하였다. 중수된 훈도청은 성신당(誠信堂)으로 불렸다. 쓰시마 번[對馬藩]의 노련한 외교가이자 유학자였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바다를 건너와 현덕윤에게 성신당의 기문(記文)을 지어 주었다. 현덕윤과 아메노모리 호슈는 이미 왜관에서 수차례 대면하였던 사이로, 1711년 통신사행에서 각기 상통사와 쓰시마 번의 안내역으로서 면식을 갖고 있던 터였다.
현덕윤은 1734년(영조시대)에 쓰시마번[對馬藩] 송사(送使)의 세견미(歲遣米) 100석을 줄인 공로로 종2품으로 승진하였다. 그 외 현덕윤은 형제간에 의리가 깊고, 환갑을 넘겼을 때 어머니의 상을 극진히 치르다가 죽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한때 재산을 상당히 모았으나 모두 나라를 위해 공적으로 사용했고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현덕윤은 시에 능하였다고 작품으로 『풍요속선(風謠續選)』 『이향 견문록(里鄕見聞錄)』있다. 1711년 통신사행의 상통사로 참가하여 남긴 필적 2점이 일본 시즈오카[靜岡] 세이켄지[淸見寺]에 남아 있다.
최근 4~5년 전까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의 태릉을 넘어서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동 샛말에 천녕 현씨 선대 묘 70~80기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택지 조성 사업이 진행되면서 보존되지 못하였다. 현덕윤의 고조 할아버지 현수겸 이하 묘가 군부대와 가까운 음식점 뒤편 배밭에 있었고, 이곳과 약 100m 떨어져서 외가인 온양 방씨(溫陽方氏) 묘를 지난 주택가 밑에 아들인 의관 현태벽(玄泰璧,1698~1760), 손자 의관 현상호(玄商祜,1732~1790) 그리고 피장자를 알 수 없는 묘 6~7기가 더 있었다. 남양주시 택지 개발이 이루어질 때 경상남도 밀양에 정착한 후손들이 3대 묘를 밀양으로 이장해 갔다.
현덕윤은 1734년(영조 10) 사역원으로 복귀한 뒤에 부산진의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문무관의 송덕비는 흔한 편이었으나 역관의 업적을 기려 송덕비를 건립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현덕윤(1676-1737)은 조선의 문신이며 호는 금곡(錦谷)이다. 1705년 과거시험인 역관에 합격해서 일본학 역관으로 업적을 쌓았다. 1711년 제8회조선통신사의 역관으로 참가했다. 서로 필담으로 교류했기 때문에 시즈오카현의 기요미스 절에 동해명구 라는 액자가 남아있다. 1718년에는 역관의 일원으로 대마도로 건너왔다. 1727년 역관훈도가 되어 사재를 들여서 노후화된 외교시설인 성신당을 개축했다. 부산 왜관에 함께 근무했던 일본 역관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는 1730년 성신당일기(誠信堂日記)속에서 현덕윤의 한일관계에서의 공적을 높이평가하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 간다면 들를 곳이 있다. 쓰시마 조선통신사역사관(2021년 10월 30일 개관)과 쓰시마박물관(2022년 4월 30일 개관)했다. 이 중에서도 조선통신사역사관은 우리와도 연관이 깊은 만큼 꼭 한 번쯤 가 보길 권한다. 마쓰 바라 가즈유키 컬렉션 중 하나인 부산 초량 왜관 모형 등이 전시된 일본 쓰시마 조선통신사역사관 전시실 모습도 볼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일 간에 왕래가 완전히 끊겼던 시기에 두 곳이 개관해 그동안 한국인 방문자는 많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한국인 방문객이 점차 늘고 있다.
쓰시마 박물관은 조선통신사 역사를 전문으로 소개하는 전시관이다. 2017년 3월 쓰시마의 한 단체가 ‘조선통신사에 의한 지역 활성화’를 제안한 것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마치다 관장은 “비록 작은 시설이지만 쓰시마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조선통신사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은 크다”고 밝혔다.
전시 자료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2017년 10월 31일) 자료 복제 외에 조선통신사 연구를 개척한 재일동포 사학자 고 신기수(1931~2002) 선생이 소장했던 일부 자료도 있다. 전시품 중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 조선통신사선 모형이 눈에 띄었다. 또 현덕윤-아메노모리 호슈가 성신당에서 담소를 나누는 종이 인형도 전시됐다. 부산 훈도였던 현덕윤은 1711년 조선통신사 상통사로 일본을 방문해 아메노모리 호슈와 친분을 맺었고, 후일 낡은 관청을 사재를 들여 개축하고 ‘성신당(誠信堂)이라고 명명했다.
조선통신사역사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쓰시마박물관은 쓰시마에 관한 1만 4000점의 자료를 모아 놓은 종합 박물관이다. “쓰시마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지키고, 알린다”는 취지에 맞춘 만큼 쓰시마의 자연, 역사, 문화, 예술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쓰시마에 전해지는 문화재를 소중히 지키며 쓰시마를 알고 배울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쓰시마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쓰시마의 문화재를 후세에 계승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지상 2층(일부 3층) 규모로, 쓰시마 번주였던 소씨(宗氏) 가문이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를 모아 두던 고분 창고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고 한다. 검은색의 큰 지붕 건물이 모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다 관장은 “전시는 고대, 중세, 근세, 근현대로 나눠서 이뤄지는데, 특히 중점을 두고 봤으면 하는 곳은 중세”라면서 “한국과 일본의 연계를 설명할 수 있는 한국 도자기나 불상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13세기 고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자 모양 청자연적’이 가장 인기가 있다. 일부 파손돼 원형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청잣빛이 곱다. 두 마리 용이 꼬리를 물 듯 새겨진 ‘청자 투조 용문 의자’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흔히 한일관계를 말할 때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흔히 말한다. 일본의 국가형성을 보면 고대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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